피흘린 발자취

  • 제1장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신약 교회의 특징

    • 1. 교회의 머리와 창설자- 그리스도, 그분은 명령을 주시는 분이요, 교회는 다만 실행기관일 뿐이다 (마 16:18, 골 1:18)
    • 2. 교회의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의 최종권위는 성경이다 (딤후 3:15-17)
    • 3. 교회의 이름 - 교회, 교회들 (마 16:18, 계 22:16)
    • 4. 교회 제도 - 회중석 : 모든 회원의 평등성 (마 20:24-28, 마 23:5-12)
    • 5. 교회의 회원 -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에 한함 (엡 2:21, 벧전 2:5)
    • 6. 교회의 의식 - 침례와 주의 만찬 (마 28:19,20)
    • 7. 교회의 직분 - 목사와 집사 (딤전 3:1)-16)
    • 8. 교회의 사명 - 사람들로 구원 받게 하고, 그들에게 침례를 베풀며, 그들을 가르치는 것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 9. 교회의 재정 정책 -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느니라 (고전 9:14)
      교인들의 십일조와 자원하는 헌금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 10. Sie ist unabhängig und vertritt die Trennung von Kirche(Gemeinde)und Statt(Mt 22:21)
    • 11. 교회의 전쟁 무기 - 영적인 것이요, 육적인 것이 아니다 (고후 10:4, 엡 6:10-20)
    •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가 아니므로 그 창설자께서는 그것에 지상의 영광이나 세속적인 권세를 부여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제도나 국가 또는 정부의 도움을 바라지 않았으며, 카이사의 폐위를 요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19 -22, 막 12:17, 눅 20:25) 또 영적인 종교이므로 세속적인 정부와 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법률적 정부를 존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을 받아 왔었다(롬 13:1-7, 딛 3:1, 벧전 2:13-16)
    • 2000년이라는 기나긴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특히 1200년간이라는 캄캄한 암흑 시대를 통하여 기독교의 자취를 더듬어 보려면 기독교의 특징이요 요점이라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것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들 중에는 보존되지 못하고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도 있지만 언제까지나 지울 수 없는 특징도 몇 가지 있다.
    • 틀림없고 확실한 몇 가지 특징들
    • 1.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로 교회를 조직하시었다. 이 종교가 널리 전파되어 다른 제자들이 생겨남에 따라 그들이 다시 다른 교회들을 세우게 되었다.
    • 2. 이 조직체 즉 교회에는 성경과 사도 및 초대교회가 실시하였던 단 두 가지의 직분, 목사와 집사가 있었다. 목사는 감독이라 불렸으며, 목사와 집사 모두 교회에서 선출하며 교회의 종이 되는 것이었다.
    • 3. 각 교회들은 그 운영과 성도를 훈계함에 있어서 서로 완전히 분리되고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를 다스릴 권리를 가지지 않았고, 안티옥도 예베소를, 에베소도 고린도 교회를 다스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교회의 운영은 자치적이고 독립적이어야 한다.
    • 4. 교회에는 두 가지의 의식만 있는데 그것은 침례와 주의 만찬이다.
    • 이것은 항구적인 것으로 또한 기념으로서 시행되어야 한다.
    • 5. 구원 받은 사람들만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행 2:47)
    • 6. 영감받은 성경만이 조직체로서의 교회뿐만 아니라 그 조직체에 속한 성도 각 개인의 믿음과 실행에 대한 유일한 최종권위가 된다.
    • 7. 예수께서 유일한 주시오, 입법자이시며,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신다.
    • 교회는 다만 주의 뜻과 이미 완성된 법률을 실행하는 집행부일 뿐, 결코 옛법률을 수정하고 삭제하여 새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부가 되어서는 안된다.
    • 8. 기독교 신앙은 모든 사람의 것이되 개인적인 것이어서 순전히 자발적으로 또는 권유에 따라 수용되는 것이지 강압적 또는 정부의 강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개인적이며 각자가 선택하여야 한다.
    • 9. 주님은 우리에게 교파의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제자라 부르셨고, 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이라고 부르셨다. 그 제자들의 조직체는 교회라고 불렸고 이러한 조직체가 하나 이상일 때는 교회들이라고 불렸다.
    • 10.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였다. 이 영적인 종교를 세속적인 정사와 결합시키거나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 *개신교와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신앙과의 분별이 필요하다.
    • * 대부분의 교회 역사는 친카톨릭적인 사람들이나 카톨릭에 동화된 사람들, 그리고 카톨릭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말은 시중에 돌고 있는 교회사에 대한 많은 내용은 오점 투성이란 말이기도 하다.
  • 제2장A.D 30-500년의 교회사

    • 초기 500년간 복음은 교회를 통해 힘있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피 흘린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와 이방 종교는 교회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박해하고 방해하였다.
    • 침례인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였고, 우리 구주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뒤를 스데반, 야고보 등이 따랐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들판에 불이 번지듯 복음의 불길은 삽시간에 로마 전역에 번져갔다.
    • 교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제자들의 수도 계속 증가되어 갔지만 어떤 교회는 계속 과오를 범하고 있었다. 신약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첫 번째 배교는 교회의 운영과 교리적인 면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신약 성경의 서신서들이 이러한 교리적이고 교회 운영 전반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서 사도들이 기록한 책들임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주의라고 불리는 은혜와 행위를 교묘히 섞는 거짓교사들과 거짓 교리를 바로잡기 위해 기록되었고, 요한의 서신들은 그 당시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영지주의의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 우리는 자주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란 모토를 내세우지만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초대교회라고 부르는 즉 에베소 교회 역시 완벽한 교회는 아니었다. 기실 인간이 구성원으로 있는 한(구원 받은 사람으로만 회원이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이 완벽한 교회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미 언급한 교회의 중요한 특징들, 그리고 신약 교회가 지키었고,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들에 동의하며 연약하지만, 믿음과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교회가 우리가 말하는 신약교회이고 또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 첫 번째 나타난 교회의 오류는 교회 운영에 대한 것이기도 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나 안티옥, 에베소, 고린도 교회 등은 이미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로 말하면 대형교회였다. 이러한 큰 교회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설교자(교사)나 장로(목사)들 그리고 집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떤 감독 즉 목사들이 신약교회에서 그들에게 부과되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다른 작은 교회들에 대해서 권한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꼬, 여러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요삼 9절) 이 교리 즉 니골라당의 교리는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도 교회에 해를 끼치는 싹을 키웠다. 이것이 카톨릭은 물론 많은 개신ㄱ교 교파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잘못된 교회 운영의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자치적인 교회 운영과는 전혀 상이가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일들은 2세기 말부터 조금씩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신약 교회 제도에 대한 최초의 중대한 이탈이 되었다.
    • 그리고 교리적으로는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관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동일한 시대에 침례의 대상자가 변화되었다. 어떤 잘못된 교회에서 침례를 하나의 구원 받는 수단이라고 주장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침례를 일찍 받을수록 더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유아 침례가 생기게 된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유아침례를 강력히 거부하였으며, 결국 A.D 251년에 이 신실한 교회들은 그러한 오류(유아 침례)를 받아들이거나 실시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와는 성도의 교제를 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기독교 초기 3세기 동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세 가지 중요하고 결정적인 이탈이 시작되었다.
    • 1. 감독의 역할과 교회 운영 방법이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빗나감
    • 2.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침례에 의한 중생으로 변질됨
    • 3. 믿는 자들만이 받는 공개적인 구원 간증으로서의 침례가 유아 침례도 인정하는 것으로 변질됨
    • 침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침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모든 과오들을 한데 뭉친 것보다도 더 악한 영향을 미쳤고, 이것으로 인해 최근의 세계대전을 제외한 모든 전쟁보다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 두 가지를 거부하였단 이유만으로 특히 12,13세기 두 세기 동안만 해도 5천만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하였다.
    •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교회가 시작되고 난 후 채 100년이 되지 않아 복음은 그 당시 알려진 모든 지역에 전해졌고 수많은 회심자를 얻었다. 동시에 사단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을 여러 가지로 하였다. 박해는 점점 심해져 4세기 초에 로마 정부는 최초의 박해령을 발표하였다. (A.D 303년 2월 24일) 그러나 이 박해령은 결국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하게 된다. 그후 황제 갈레리우스는 8년 만에 처음 내린 칙령을 처뢰하고 신앙의 자유를 용납하는 다른 법령을 발표한다. A.D 313년에 교회들은 이교도들에 대해 압도적으로 승리하였다. 진위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황제 콘스탄틴은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교활한 정치가인 그는 종교를 국가 통치에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기독교는 세속 정부와 결혼하였고,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된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비유가 말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주후 313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 정부와의 혼인을 통해 세상의 인정과 권력을 가졌으며 정부는 국론을 통일하는데 일정 부분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교권 제도의 형성을 의미한다. 이 교권 제도가 형성됨으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의 자리에서 추방되었고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머리로 등장하였다. (그는 믿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었고 그의 휘하의 그의 명령에 의하여 세례를 받은 군인들도 그러하였다, 그는 그 후 우습게도 종교 회의 의장으로 회의를 이끌며 삼위일체에 대한 중요한 교리에 결정을 하여야 했다. 그는 올바른 결정을 하긴 했지만 아리우스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했고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올바른 성경적인 교리의 정립이 아니라 국론의 통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이 교권 제도는 마침내 오늘날 알려져 있는 카톨릭 또는 우주적 교회로 발전될 하나의 뚜렷한 시작이었다. 카톨릭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어떤 이는 2세기 말이나 3세기 초엽에 이미 시작이 되었다고 말하며(캐롤 박사) 어떤 이는 6세기에 레오 2세가 교황제도를 시작했을 때라고도 말한다.
    •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콘스탄틴이 종교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거기에 응하기를 거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쉽게 띄지도 않을뿐더러 그 후 기록된 카톨릭 학자들이 이들을 배격하였기 때문에 (개신교는 작은 집, 카톨릭은 큰 집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그들은 국가와의 혼인을 원치 않았으며 중앙집권적인 교회 정치나 또는 지역 교회 이외에 어떤 종류의 정치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국가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그들의 믿음을 계속해서 어려움 가운데 고수해 나간다. 우리 성경대로 믿고 신약 교회를 지향하는 믿는 이들은 개신교의 후예가 아니라 이러한 믿음의 선조의 후예라는 우리의 정확한 뿌리를 알고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개신교인이 아니라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의 후예이다. 개신교인들은 훨씬 이후에 가톨릭 가운데 약간의 빛을 보고 나왔지만 여전히 많은 카톨릭적인 잔재를 가지고 많은 오류를 범한 일단의 무리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나? 그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는 그의 고국 스코틀랜드에 어떠한 교회를 시작했나? 마틴 루터가 시작한 루터 교회는 어떠한 교회를 지향하였나? 그들은 교회 운영에 있어서 신약교회의 원칙을 지켜나갔고 교리적으로 순수하였나?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실시하였고, 국가와 관계를 끊지 못했고, 어떤 이는 심지어 신정국가를 꿈꾸었다.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오해하였고,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카톨릭이 했던대로 폭력을 행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다른 종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고 가혹하였는지 역사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들은 개신교의 후예였지 피로써 그들의 순수한 믿음을 지켰던 우리 믿음의 선배라 부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 교회와 국가의 결혼을 추진한 콘스탄틴 황제는 침례에 대해서 고민하였다. 그는 침례로 인한 죄씻음을 믿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침례를 받고 나서 짓는 죄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결국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한꺼번에 씻기 위해서 죽기 직전에 침례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천국에서 결코 이 대단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 이 후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카톨릭의 분열은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자!
    • 교권제도가 형성되어 교회와 국가가 서로 결합하기 전에 있었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교와 이방 종교에 의하여 행해졌다. 그러나 이제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들은 입법자가 되어서 유아 침례를 법으로 제정한다. 유아침례는 의무적인 것이 된다. (A.D 416) 이 법으로 인하여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이 폐기되었는데, 그것은 믿는 자만이 침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과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침례에의 순종이다. 이 새로운 교리와 법률의 필연적인 결과로 잘못된 교회들은 곧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법에 반대하여 그들의 자녀를 침례 받게 하지 않았고 한 사람이 성경적인 교회의 회원이 되고 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한 간증과 재침례를 요구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빼앗기고 대신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몬타니스트, 터툴리안, 노바티안, 파테린 등이 그것들이다. 또한 그들은 유아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침례를 베푼다는 이유로 아나밥티스트로 불리기도 했다. A.D 426년 유아 침례가 제정된 지 10년 만에 암흑시대라 불리는 무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 교황 제도의 시작은 암흑시대 초기였으며, 이는 주후 440년에서 461년에 있었던 레오 2세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교황이라는 명칭은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교황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로 선언되었다.
    • 이제 처음 5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1. 자치적인 체계에서 수직적인 위계 체계로의 점진적인 변화
    • 2.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구원에서 침례에 의한 중생의 교리
    • 3. 믿는 자의 침례에서 유아 침례
    • 4 교권 제도의 확립, 교회와 국가의 결혼
    • 5. 황제의 거처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감
    • 6. 유아 침례가 법령으로 선포되어 의무화됨
    • 7.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
    • 8. 주후 426년에 암흑 시대가 시작됨
    • 9. 복음보다는 칼과 횃불이 구원을 받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 것
    • 10.신앙의 자유라고 볼 만한 모든 것은 시들어 매장되었으며 매장된 그대로 여러세기가 지나간 것
    • 11.신실한 신약적 교회들은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든지 간에 카톨릭의 새로운 세속적인 권력에 의해 최후의 곤경까지 쫓기게 됨. 온 세상에 흩어진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숲이나 산 속 그리고 산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불안한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
  • 제3장 주후 600- 1300년의 교회

    • 교회 시대를 구분함에 있어 요한계시록 2, 3장의 구분대로 그렇게 일곱개로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할 때 예루살렘 교회에서 대략 140년 정도까지를 에베소 교회라 볼 수 있겠고 그 다음 극심한 박해 아래 살았던 교회 즉 서머나 교회 시대를 140년 후부터 313년 정도까지 볼 수 있겠다.
    • 그리고 버가모 교회에 해당하는 시기가 그 후 약 606년까지 지속되었고 그 이후부터 종교개혁의 시기까지를 두아디라 교회 시대라고 부를 수 있겠고 그 다음 종교 개혁 후부터 18세기 말까지에 해당하는 사데 교회 시대가 이어지고 다음으로 19세기 초부터 빌라델비아 교회가 시작된다.
    • 그리고 20세기 초부터 미지근한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그러므로 제 3장에서 다루는 내용은 시대 구분에 있어서 두아디라 교회 시대이다. 이 교회의 남은 부분은 4장에서 다루도록 한다.
    • 우리는 이제 세계 역사에서 암흑시대 혹은 중세 암흑시대라고 불려지는 무서운 시대로 들어왔다. 제도화된 로마 카톨릭에 의해 가혹하고 잔학한 박해가 계속되었다. 고의적인 섬멸전이 계속되어 성경대로 믿는 신자들은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했다. 특히 영국, 웨일즈, 아프리카, 아르메니아 및 불가리아 등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런 지역 외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신실하려고 완강하고도 간절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이제 에큐메니칼(이 단어는 이제 우리에게 슬프게도 많이 친숙한 것이 되어 버렸다) 또는 전 제국 회의라는 종교 회의에 대하여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은 최초의 교회 회의였던 예루살렘의 교회 회의를 닮은 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철저하게 다른 것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여하튼 사단과 사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방의 명수이다.
    • 여기서 우리는 여덟 번의 종교회의를 고찰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각기 다른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그 중 어떤 것도 교회에 의하여 소집된 것은 없었다.
    • 첫 번째 공회는 주후 325년 니케아에서 개최되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국가가 경비를 제공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이고, 편리함인가!! 국가와 결혼한 교회는 이제 핍박을 받는 위치에서 대접을 받고 외형적인 존중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속 군주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침례받기를 거절했던..) 종교 회의를 주관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가 했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 두 번째 공회는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고, 테오도시우스 대제에 의하여 소집되었으며 150명의 감독들이 출석하였다.
    • 세 번째 공회는 주후 431년에 에베소에서 개최되었다.
    • 네 번째 공회는 황제 마리안이 주후 451년에 칼세돈에서 소집하였다. 500-600면의 감독들과 메트로폴리탄(감독장)들이 출석하였다. * 메트로폴리탄은 도시 교회의 목사 또는 큰 교회 목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 이 종교 회의에서 소위 마리아 숭배의 교리가 공포되었다.
    • 새로운 중보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기도는 마리아를 향해 드려지게 되었고, 마리아는 그들의 기도를 그리스도께 전달하도록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 중보자로 일하고, 천상의 합창단을 인도하며, 합동 구주로 존재한다.
    • 지금 그녀는 격무에 시달린다. 그녀의 세계에는 아마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나보다^^
    • 다섯 번째 공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주후 553년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다. 165명의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 여섯 번째 공회는 역시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체되었고 이 회의를 통하여 오노리우스라 이름하는 교황이 폐위되었고 파문되었다. 말하자면 이때까지는 교황 무오설이 선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일곱 번째 공회는 주후 687년 니케아에서 소집되었다. 아이렌 황후가 이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성상 숭배와 성인 숭배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런 회의들을 통해서 기독교가 성경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교도화 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여덟 번째 공회는 주후 86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카톨릭은 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후부터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우세하게 되었고 황제가 아니라 로마의 교황이 모든 교회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다.
    • 이 때 교회는 유아 성찬을 실시한다. 그들은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 교회에 받아 들여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였다. 빵을 포도주에 적셔 주는 위대한 발명을 하게 된다. 얼마 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교리가 첨가되었는데, 그것은 이 유아 성찬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
    • 8세기에는 두 가지의 새로운 교리가 카톨릭의 신앙에 첨가되었는데, 이는 주후 687년 니케아에서 열렸던 공회에서 선포되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성상 숭배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심각하게 범하는 모독적인 것이다. 그리고 성인 숭배가 행해졌다.
    • 이 시기에 박해를 박해를 당하였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명칭 중에는 도나티스트, 파테린, 카타리, 폴리시안, 아나밥티스트 등이 있었으며, 후대에 와서는 페트로-부르시안, 아놀디스트, 헨리시안, 알비겐즈, 왈덴스 등이 있었다. 물론 박해를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신실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중 몇몇 사람들은 놀랄만큼 신실하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또 주의하여 볼 것은 카톨릭의 교리에 위반되는 어떠한 견해나 또 그것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아주 극단적인 계획과 수단이 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읽어보라, 유럽판 분서갱유의 예를 본다. 진시황의 그것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집요하고 오랬동안 실시되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 어떤 종류의 책이든 카톨릭 이외의 서적일 때에는 다 모아 불살라 버렸으며, 특히 성경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래서 정확한 역사를 후세인들이 알기 힘든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이 시대에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완고한 이단자들'이라고 불렸고 그들은 어떤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거나 어떤 곳에 살고 있든지를 막록하고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초기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중에서 도나티스트와 폴리시안은 현저하게 드러나는 무리들이다.
    • 참된 신자를 핍박했던 자들은 교회의 높은 자리에 앉아 사도적 계승을 주장하며 자기들과 같은 변질된 신앙을 가지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비난하며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쉬지 않고 자행하였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이교화 되었으며 유대교화 되었고, 복음의 능력보다는 세상 권세의 힘으로써 움직이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입법자가 되어 성경과 결코 상관없는 많은 법들을 쏟아내놓았다.
    • 카톨릭은 신약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순결한 기관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새 법을 만들어 성경을 변개시키기도 하고 삭제시키기도 하는 입법기관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 이 당시 그들이 만든 새로운 교리 또는 공포된 법령 중 하나는 ' 교회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카톨릭 교인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 면죄부 교리와 면죄부의 판매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전혀 새로운 것이며 곧 카톨릭 내에서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이 교리는 선행에 의한 구원의 교리로 연결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신 공로는 천국의 장부에 계산될 최초의 큰 액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가산하여 사도들이 행한 선행의 잔여액 전부와 그후에 생존한 모든 착한 사람들의 선행을 이 신용 대부 증서에 가산하여 그것을 굉장히 거대한 것으로 만들게 하였다. 이 막대한 액수 전부가 교회에 위임되었고 (유일한 교회에!) 교회는 어떤 가련한 죄인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천국으로부터의 신용 대부가 필요하였던 각 사람들을 위하여 적당한 액수를 지불케 할 권한이 교회에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이러한 배경하에 면죄부의 교리와 판매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최초로 종교개혁의 시기에 시행되었으며 루터에 의해서 배격된 것이 아니다. 면죄부의 교리는 7세기 초에 이미 존재하였다) 면죄부를 팔기 위해서 죄의 목록별로 용서를 위해 지불해야 할 구체적인 금액이 지정되었다. 면죄부의 교리와 면죄부 판매가 완전한 효력을 발생하기 위해서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교리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옥의 교리이다.
    • 여기서 그리스도 정교와 로마 카톨릭의 차이를 잠시 열거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1. 국적으로 보면 그리스 정교는 그리스,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을 포함한 슬라브 족속들에게 퍼져 있었으며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 편 카톨릭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남부 및 중앙 아메리카, 멕시코 등을 포함하는 라틴 족속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 2. 그리스 정교는 침례를 받을 때 적수례와 관수례를 거부하였으나,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근본 방법인 침수례를 변경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전적으로 적수례를 행하게 되었다.
    • 3. 그리스 정교는 유아 성찬을 계속 실시하였고, 로마 카톨릭은 처음에는 그것을 구원 얻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가르쳤으나 결국 다념하고 만다.
    • 4. 그리스 정교는 성찬식 때 평신도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었으나, 로마 카톨릭은 평신도에게는 빵만 주었고 포도주는 신부들이 마셨다.
    • 5. 그리스 정교는 사제의 결혼을 허용하였으나, 로마 카톨릭은 신부들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 6. 그리스 정교는 교회의 무오설을 부인하였으마 카톨릭은 그 교리를 받아 들였고 강조한다.
    • 10세기에 들어와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 암흑 시대라고 불리는 1200년동안 약 5천만명의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것은 1년에 4만명 10년에 40만명이 죽어나갔다는 계산을 낳게 된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는지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이 관심이 있는 분들은 폭스의 순교사를 읽으면 좋겠다)
    • 이 시기에는 이교도의 정부와 교회가 결탁하여 국가 교회의 형태를 띄게 되었고 핍박은 이제 유대인이나 일부 이교도들에 의해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불리는 괴물같은 기관을 통해 조직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해지게 되었다.
    • 어떠한 민족이나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법을 포함하고 있는 신약 성경을 버릴 때에 그는 나침반 없이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이 잘못된 저주 받은 무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자신의 저서 천주교 사상 평가에서 말한 것처럼 끊임없이 그것에 무엇을 첨가하고 그 첨가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른 발명을 해대며 교회는 더 이상 이미 완성된 하나님의 법을 실행하는 곳이 아니 입법부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 17장과 18장에 나타난 음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 성경이 바로 이와 같은 의미 심장한 말로 끝을 맺고 있는 이유다.
    • " 이는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들을 듣는 각 사람에게 증거함이니 누구든지 이것들에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삭제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책과 거룩한 도성과 이 책에 기록된 것들에서 그의 부분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81,9)
    • 그래서 우리는 여러 회의에서 통과된 결정 사항이 설령 훈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 서방 교회 회의는 교황들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그 최초의 회의는 주후 1123년 칼릭터스 2세에 의해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서 사제들의 결혼이 금지되었다.
    • 주후 1139년 교황 이노센트2세는 페트로부루시안과 아놀디스트로 알려진 두 무리의 대단히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 40년 후인 1179년에는 그들이 불경한 자들이라고 불렀던 왈덴스와 알비겐즈 무리들이 문책되었다.
    • 주후 1215년에는 이노센트 3세에 의하여 '화체설'이라고 하는 새로운 교리가 선포되었다. 비밀 고해성사도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 종교 재판에 역사에 대하여서는 관심있는 독자들이 다른 책들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세상에 존재하는 역사 중 가장 부끄럽고 추악하며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을 통해 나타났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자행하였던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평화를 요란하게 외쳐댄다.
    • 주후 1229년 타울로우스 공회에서는 모든 평신도들 즉 신부들과 고위층 사제 이외의 모든 카톨릭 교도들이 성경을 임의로 읽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선포되었다.
    • 1245년 교황 이노센트 4세에 의해 소집된 리용 공회의 주요 목적은 독일 황제 프레드릭 1세를 파문하여 폐위시키기 위한 것이다.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국가와 교회가 결탁함으로써 음행한 신부 카톨릭이 이제는 주인이 되어 국가와 정부의 시책을 지휘 명령하였고 국왕과 여왕의 폐위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 지금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소선에서 사이버 신학 강의를 하면서 교과 과목 중 교회사를 채택하여 이0규 목사 등을 통해 강의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교회사 강의를 통해 성경적인 신약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회만이 유일한 복음적인 교회이며 박0수 목사가 이 시대의 유일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세뇌시키려는 것이었다.
    •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시도이고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맞먹는 진리의 왜곡이라 아니할 수 없다.
    • 특히 모세 이후에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었고 16세기에는 마틴 루터가,18세기에는 요한 웨슬레가 하나님의 종으로 그 시대를 이끌었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쓴 웃음이 나온다.
    • 하나님은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한다고 말한다.
    •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다고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두 인물 즉 요한 웨슬레와 조지 휘트필드는 동시대에 영국에서 일하였던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렇다면 이 둘 중 누가 그 시대의 하나님의 종이었나? 기소선은 조지 휘틀필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기에 웨슬레라고 말한다. 궁금한 사람들은 조지 휘트필드의 일기를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사실 그들이 하는 일들을 교회사 전반을 통해 보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이교도들의 무리, 카톨릭의 무리들이 행하였던 것과 너무 많이 닮았다.
    • 교회사는 한 단체나 한 사람을 용비어천가 식으로 유일한 단체와 유일한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어용 학문이 아니다. 교회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과거를 통해 현재의 나와, 내가 속해 있는 교회를 성경의 잣대로 그리고 역사의 잣대로 냉철하게 재어보며 영적인 균형감각을 가지게 하여준다.
    • 과거에 존재했던 이단은 지금도 존재하고, 특이한 사냥꾼이었던 니므롯의 후예들은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며 의의 일꾼을 가장하며 지금도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 우리는 교회사 연구를 통해 과거를 보며, 과거를 통해 현재를 지혜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사람과 조직의 종이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를 바란다. 교회사 연구는 그러한 일에 많은 유익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