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성경공부교재

14-04-19 19:14

4월 20일 셋째주 주일 성경학교 성경공부 교재입니다.

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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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선택인가?  요한복음 18:28~40  

 

이야기속으로
아래 질문들은 이번 과의 주제에 대한 괄적인 나눔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의 목적은 솔직한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나누고, 주제에 대해 생각이 열렸다고 판단되면 '본문 속으로' 넘어가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 뜻을 아시기에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려 십자가 길로 나아가셨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시작해 베드로의 부인, 빌라도의 재판, 채찍질과 조롱을 거쳐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묵묵히 감당하며 끝까지 걸으셨음을 본다. 공동체에서 어떤 분과 오랫동안 함께 교제하면서 이야기를 들어 주고 공감하며 위로하곤 했는데, 바른 소리를 한 번 했다가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다. 이후 그분은 주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험담을 했고, 결국 그것이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나는 자신을 변호하면서 결국 동일하게 그분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며 나를 세웠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죄가 없으셨지만 억울한 일과 모든 고난을 묵묵히 감당하신 예수님을 보며 허물 많은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나를 세우기에 급급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일을 묵묵히 감당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보며, 내 부족함과 부끄러운 모습을 깨닫는다. 깨어진 관계 회복을 위해 내 입장을 내세우기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모습을 따라야겠다.


선택의 중요성을 깨달은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보세요.


인도자를 위한 예화
결혼한 지 햇수로 16년 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작은 빌라를 하나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작은 아파트를 잠시 갖고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변변하게 제 집을 지니고 살아 보지 못한 터라 집을 사고 등기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놀랄 만한 일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집을 팔고 살 때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별로 크고 좋은 집도 아닌데 세금이 7백만 원가량이나 나왔습니다. 세금에 관한 업무를 처리해 주는 중개사무소와 법무사무실에서는 우리에게 두 개의 계약서를 쓰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집을 사고판 진짜 계약서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을 적게 부과받을 목적으로 허위로 작성하여 관공서에 제출하는 가짜 계약서였습니다. 그 사람들의 충고는 이렇게 이중 계약서를 쓸 경우 350여만 원만 내도 되는 세금을 무엇 때문에 곧이곧대로 모두 내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런 식으로 집을 사고판다고 가르쳐 주는 직원의 슬기로운 눈빛은 어느새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이 비웃는 눈빛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몇 가지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그러나 즉시 그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세상과 다른 윤리가 규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롬 13:6~7). 무리할 정도로 힘들게 마련해서 세금을 납부했지만, 납부하고 난 다음에는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하는 길을 버리고 바른길을 걸어 간 결정이 준 자유가 경제적인 부담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 김남준, 「영적 회복은 불꽃처럼 번져 가야 한다」(두란노)


Sharing Point
매 순간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당시에는 중요하게 보이지 않던 사소한 선택이 우리 인생에 결정적인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잠깐 양심과 신앙의 진리를 외면하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속으로
본문을 통해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을 이번 과의 주제와 연관해 나눠 보는 순서입니다. 세 번의 질문은 모두 해석 질문으로서, 그것을 읽고 해당 본문을 찾아 함께 답을 말해 보십시오.
 

1. 예수님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28절)

이방인의 집에 들어감으로 인한 제의적 부정 때문에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까 봐 예수님을 고소한 사람들은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0:28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이 다른 나라 사람과 교제하거나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이라고 증언합니다. 유대인이 이러한 위법으로 인해 부정하게 되어 정한 때에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하면 한 달 후에 그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민 9:5~12). 예수님을 고소한 유대인들은 제의적 순결을 지키려고 예수님만 관정에 들여보내고 자신들은 관정 밖에 머물며 소송을 진행합니다. 그들은 서슴없이 이방인을 이용해 예수님을 처형하려 하지만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역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제의적 부정으로 인해 유월절 음식을 먹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이방인의 관정으로 예수님을 밀어 넣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먹기 위해 스스로 부정을 피하려고 유월절의 진정한 실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1:29)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죽음에 넘겨지심으로 인해,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을 되새기던 유대인의 유월절이 만민을 위한 진정한 유월절로 완성됩니다.


*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내 잇속을 챙기려는 위선적인 모습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나누어 보세요.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데려다가 그들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권고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31절). 이것은 예수님을 로마의 특정 방식, 즉 십자가형에 의해 죽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으로 만들려는 계략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십자가형이야말로 예수님이 예언하고 택하신 죽음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한 죽음으로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그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그들의 언행들은 사실 현실적인 삶에서 유익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위해 율법을 행한 것이 아니었으며 형식과 외식으로 이루어진 율법주의를 낳고 말았습니다. 한 예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는 ‘고르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드린 예물이 아니라 육신의 부모를 섬겨야 하는 현실적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막 7:10~13).

2. 빌라도가 예수님을 사면하려 하자 유대인들은 어떤 요청을 했으며 그것은 어떤 역설을 담고 있나요?(38~40절; 마 27:17 참조)

유대인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사면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교 신앙을 어지럽히고 로마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폭도라고 주장했지만, 진짜 폭도인 바라바를 사면하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그들의 불의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그가 로마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진술은 빌라도를 잠시나마 불편하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진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촉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는 누구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인정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리에 올바로 반응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서 그는 진리와 세상 사이의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며 폭도라고 고소했으나, 사실은 진짜 폭도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절)라는 말은 이러한 상황적 역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름에 담긴 뜻처럼 ‘사람의 아들’(바라바)과 ‘하나님의 아들’(예수님)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마 27:17), 그들은 메시아를 열망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사람의 아들’로 상징되는 세상을 열망하고 있었습니다.


*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서 진리와 양심보다 현실적으로 유리한 것을 택한 적이 있다면 나누어 보세요.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절)라는 말은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불의한 상황을 보여 주는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촉구를 받아들이지 못한 빌라도는 강도의 석방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귀 기울입니다. 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나약해진 빌라도는 예수님의 자유를 명할 수 있는 자리에서 그것을 위해 유대인들과 흥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절)라는 소극적인 ‘도덕적 성향’을 넘어서서 무죄하신 예수님에 대해 자유를 선언하는 ‘실천적인 행동’을 해야 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진리에 속한 자라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요일 3:18~19).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마태복음에서는 바라바를 먼저 언급한 사람이 빌라도지만,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유대인들이 먼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요구합니다. 바라바에 대해서는 복음서가 제시하는 정보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바라바’는 개인 이름이 아니라 탈무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친의 이름을 사용한 방식(‘바요나 시몬’처럼)으로 ‘son of abba’(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Barabbas’라는 철자의 다양한 발음을 인정할 경우 ‘son of rabban’(스승의 아들)이란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는 공통적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사본의 일부는 ‘바라바’를 ‘예수 바라바’(Jesus Barabbas)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그리스도 예수’와 ‘바라바 예수’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두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됩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에 대한 선택은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상징성이 매우 큽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바라바 중에서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메세지 속으로
아래 질문들의 의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질문들 밑의 칼럼은 토론을 진행하는데 추가적인 안목을 주기 위해 제공된 것입니다. 각 질문에 대한 생활 나눔을 마치고 참석자들 중에 한 사람에게 읽도록 해도 좋습니다.
 
유대인들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죄인 취급해 빌라도의 관정에 넘기면서 유월절은 거룩하게 보내겠다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유월절 희생양 사역을 완성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막고자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는 십자가형을 주장한 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모세의 놋뱀처럼 나무에 달려 높이 들릴 것이라는 예언을 성취하는 역설을 낳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매 순간 하나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진리로 믿고 선택하며 담대히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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