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성경공부교재

14-04-20 19:41

4월 27일 넷째주 주일 성경학교 성경공부 교재입니다.

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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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갈라디아서 4:1~11

 

이야기속으로
아래 질문들은 이번 과의 주제에 대한 괄적인 나눔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의 목적은 솔직한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나누고, 주제에 대해 생각이 열렸다고 판단되면 '본문 속으로' 넘어가십시오

사업을 하면서 오랜 세월 부유함과 가난함을 오가며 지냈다. 그러다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절실히 느껴 “될 대로 되라!” 하면서 삶을 포기하려 했다. 자기 힘으로는 어느 누구도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세상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바울은 상속자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기 전 모습과 믿은 후 모습을 설명한다. 나 역시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만으로도 ‘세상의 지배를 받는 자’에서 ‘세상을 가진 자’로 바뀌었음을 깨닫는다. 이제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신데, 누구를 부러워하겠는가? 어찌 과거의 불신자 생활을 그리워하겠는가? QT를 하면서 하루하루 말씀으로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해 세상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녀가 되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말씀에 이끌려’, ‘말씀에 젖어’ 사는 기쁨을 누리며 나누는 QT 사역자가 되자. 


성도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 때문에 불만을 품나요, ‘할 수 있는 일’ 때문에 감사하나요? 


인도자를 위한 예화
나이 든 수도자가 젊은 제자와 함께 진흙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걷다 보니 작은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물가에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비단옷을 입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습니다. 이때 스승이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이리 오시오. 내가 개울을 건너게 해 드리리다.” 수도자는 여인을 번쩍 등에 업어 개울을 건넜고, 건너편에 도착하자마자 여인을 땅에 가뿐이 내려놓았습니다. 여인의 감사 인사를 뒤로하고 수도자는 발길을 옮겼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는 스승의 행동에 화가 났습니다. 그러고는 저녁 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 스승에게 꾹꾹 눌러 참았던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수도자가 여인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여인을 업고 개울을 건너셨습니까?” 스승은 제자의 항의에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답했습니다. “나는 개울을 건너자마자 그 여인을 내려놓고 왔네. 그런데 자네는 왜 아직도 여인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가?”
혹시 당신도 진작 내려놓았어야 할 인생의 짐을 내려놓지 못한 채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이미 감당하신 짐들을 스스로 주섬주섬 챙겨 지고는 힘겹게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까? - 김석년, 「십자가를 살다」(두란노)


Sharing Point
그리스도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해서 올바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윤리적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규제 사항만 강조하다 보면 율법주의적인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자유와 용서의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 나누어 봅니다.


본문속으로
본문을 통해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을 이번 과의 주제와 연관해 나눠 보는 순서입니다. 세 번의 질문은 모두 해석 질문으로서, 그것을 읽고 해당 본문을 찾아 함께 답을 말해 보십시오.

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상태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나요?(1~3, 5, 8절)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린 자로서 종과 다름없어서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었으며,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해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 상태를 비유로 제시합니다. 먼저 ‘어린 자로서 종과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경우를 예로 든 것입니다. 헬라 사회에서는 유업을 이을 자, 곧 상속권을 가진 자녀라 할지라도 성년이 되기 전에는 가정교사와 같은 ‘후견인의 보호와 관리 아래’에 있었기에 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는 말은 ‘우주의 기본적인 정령들’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헬라 사회에서 소위 우주의 근원이라 해서 숭상되던 물, 불, 흙, 공기를 말하기도 하고, 혹은 그 우주의 조정자로 숭배되고 있던 일월성신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이방인들은 바로 그런 ‘세속적 초등 학문 밑에서 종노릇하던 자들’이었고,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유대인들 또한 율법을 그렇게 섬기며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의 상태가 바로 이렇게 세상과 죄와 율법에 대해 종의 상태에 있었다고 비유합니다. 


* 최근에 근심되거나 자유롭지 못한 일이 있나요? 그 일은 바울이 묘사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현재 근심과 두려움으로 억눌려 있다면, 그 원인이 되는 삶의 사건과 현실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어린아이’와 같이 누군가의 도움이나 보호가 필요한 상태인 것입니다. 그 문제가 가진 의미를 찾고 올바르게 해석해서 내게 유익하도록 이용하고 삶의 방향과 목표까지 발견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기준과 틀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특정한 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험과 습관, 가치관, 이상적인 역사와 철학, 도덕과 윤리, 사회적인 경향과 여론이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일을 해석하는 준거들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준거 역시 ‘세상의 초등 학문’과 다를 바 없이 불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기준이 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헛된 것에 붙들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모든 문제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2. 하나님이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게 하려 우리에게 행하신 두 가지 일은 무엇인가요?(4, 6절)

때가 되자 하나님은 종의 신분으로 있는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며, 그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아들의 명분을 얻다’라는 말은 ‘양자로 삼다’(adopt)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죄의 종이 된 처지로부터 구해 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종’에 불과했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영’, 즉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려 하심입니다. ‘아빠’란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였던 아람어를 소리 나는 그대로 음역해 놓은 것으로서, 자녀가 아버지를 매우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이처럼 친근하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이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보증해 주셨습니다. 


* 참된 자유를 누리고, 목적 있는 소망을 품기 위해 오늘 필요한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단순히 죄와 세상에 종노릇하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우리를 속량하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고 친히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가족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고 유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얻은 이 자유는 순간적이고 과거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히 계속되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음은 물론이며,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 하시고 그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축복입니다. 또한 그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고 친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위로하시며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건히 하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기억하고 그 충만하심을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초등 학문’은 헬라어 ‘스토이케이온’으로, 고대의 우주관이나 운명론 등을 말합니다. 즉 물질계의 기본 요소를 주관하는 영에 대한 철학과 종교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당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그에게서 받았던 복음을 위협하는 거짓 교훈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거짓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 1년 내내 절기를 지키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의의 조건으로 삼는 율법주의를 따랐습니다. 이는 바울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10절)라고 언급한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믿은 성숙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 초보적인 초등 학문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지도해야 했습니다.

메세지속으로
아래 질문들의 의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질문들 밑의 칼럼은 토론을 진행하는데 추가적인 안목을 주기 위해 제공된 것입니다. 각 질문에 대한 생활 나눔을 마치고 참석자들 중에 한 사람에게 읽도록 해도 좋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 잡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러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자유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녀로 입양해 상속자로 삼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모든 부유함을 상속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주신 고귀한 구원입니다. 만일 아직도 세상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 원리에 따라 살거나 특정한 종교 의식을 삶의 의로운 기준으로 여긴다면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고,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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