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성경공부교재

14-08-17 13:33

14년 8월 24일 주일성경공부교재

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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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왕의 침묵 마가복음 15:1~15


이야기속으로
아래 질문들은 이번 과의 주제에 대한 괄적인 나눔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의 목적은 솔직한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나누고, 주제에 대해 생각이 열렸다고 판단되면 '본문 속으로' 넘어가십시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해 자기에게 넘긴 줄 알면서도 결국 회중이 원하는 결정을 내렸다. 다수의 뜻을 만족시킴으로써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고자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자신의 판단을 따른 결정이었다. 우리 삶 속에서 순간순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대학 시절 마지막 학기를 보내면서 내 생각과 판단으로 연봉을 보고 대기업의 문을 두드렸고 H그룹에 입사했다. 하지만 기도하며 하나님 뜻을 구하지 않고 시작한 직장 생활은 술, 담배, 접대 문화 등으로 인해 너무 힘들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을 하지 못하고, 빌라도처럼 나 자신의 입장과 생각을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 1년 반 만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대기업에 다닌다고 나를 대단하게 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넉넉한 연봉 등 내 기준으로 선택한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과 달랐던 모양이다. 앞으로 남은 인생 가운데 많은 선택과 결정의 순간이 있을 것이다. 매 순간 내 뜻보다 하나님 뜻대로 선택하고 결정하도록 기도해야겠다.

* 스스로 낮아지는 선택을 한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인도자를 위한 예화
유럽의 한 동네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한 아이가 유대인 아이와 더불어 싸움을 한 것이다. 유대인 아이는 맞고 나서 분한 듯 이렇게 말했다. “나도 너처럼 고기와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면 너를 이겼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자기가 사는 동네에도 고기를 먹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곤 다시는 친구들과 싸움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바로 슈바이처다. 슈바이처는 그 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그리고 힘없는 사람의 편에 선 삶을 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슈바이처가 노벨상을 타게 되어 기차로 여행길에 올랐다. 마침 기자가 이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차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1등칸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곳에 가 보았으나 슈바이처는 그곳에 없었다. 2등칸에 있겠지 하고 그곳에 가 보았으나 역시 그곳에도 없었다. 혹시 이 기차를 타지 않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3등칸을 둘러보았다. 슈바이처는 누추한 3등칸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기자는 “슈바이처 박사님, 왜 1등칸에 계시지 않고서요?”하며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는 항상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있길 원한다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야.”
- 양창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법」(브니엘)

Sharing Point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현실적이 되라고 속삭입니다. 또한 힘의 논리를 주장합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도 똑같은 시험으로 유혹했고, 지금도 우리는 이러한 시험을 계속해서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모범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수많은 조롱과 경멸을 받으면서도 침묵하며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중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도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본문속으로
본문을 통해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을 이번 과의 주제와 연관해 나눠 보는 순서입니다. 세 번의 질문은 모두 해석 질문으로서, 그것을 읽고 해당 본문을 찾아 함께 답을 말해 보십시오.
1. 빌라도의 심문에 대한 예수님 답변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요?(2~3절) 빌라도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놀랍게 여겼나요?(4~5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응답하십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주된 내용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여러 가지 죄목으로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셨고 빌라도는 이를 놀랍게 여겼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및 서기관들이 결박해서 끌고 온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는 무리가 예수님께 덮어씌운 죄목을 순순히 인정하신 것이어서 그들은 더욱 흥분하며 예수님의 세부적인 죄목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항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심문당하는 자들은 재판관에게 자신의 입장과 정당성을 변론하려고 애쓰는데 예수님은 고소인의 고소 내용을 스스로 인정하고 침묵하고 있으니 빌라도는 그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이 재판의 주관자가 빌라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억울한 상황에서 침묵한 적이 있나요? 침묵한 이유는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손해 또는 유익이 있었나요?
빌라도의 법정에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고소장에 대해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자신을 매우 불리한 상황에 내던지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만유의 왕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진리를 말씀하셨으며, 십자가 죽음에 대한 주도권과 결정권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특히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다가 대립과 갈등을 겪게 되는 경우에라도 진실과 진리만을 말해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당해야 할 사역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했을 때 여러 가지 변론과 반박이 일어나고 오해를 받거나 손실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방어하는 대신에 침묵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삶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2. 전례에 따라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려고 했나요?(9~10절) 결국 바라바를 놓아준 이유는 무엇인가요?(11, 15절)
빌라도는 명절 특사의 전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해서 바라바를 요구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바라바를 놓아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재판정으로 끌려온 것이 그분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고소인들의 시기심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명절의 전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 결박되어 온 것이라면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용해 예수님을 사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충동했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들의 회유에 휩쓸려 오히려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 지릅니다. 결국 빌라도는 여론에 떠밀려 무리를 만족시키고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시기심으로 인해 고소당한 것을 알았기에 명절 전례를 이용해 예수님을 석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도 이 일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예수님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대제사장들의 회유에 넘어갔고, 여론에 떠밀린 빌라도 역시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저버렸습니다.

* ‘순수함’과 ‘무지함’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순수해서 기회를 얻었거나 무지해서 기회를 잃었던 적이 있다면 나누어 보세요.
예수님은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로 고소당해 빌라도 법정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빌라도는 유대교에 관해 무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길지 않은 심문 과정을 통해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이 재판이 고소인들의 시기심 때문에 시작된 것임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의 경우 이방인의 ‘순수함’을 통해 유대교 지도자들 속에 담긴 이기적인 시기심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며 전례를 이용해서라도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국의 힘을 가진 통치자이며 재판의 주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의 열기가 고조되는 과정에서 대제사장들의 권력과 대중의 여론에 주도권을 잃어 가는 무지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순수함’으로 기회를 얻었으나 ‘무지함’으로 기회를 잃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법정에 있었던 무리도 빌라도가 전례를 통해 예수님을 사면하려고 했을 때 그들이 ‘순수’했다면 그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그들의 ‘무지함’ 때문에 대제사장들의 충동과 회유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고 맙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빌라도의 말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호칭한 첫 번째 경우로서 본문 9, 12, 18, 26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유대인의 왕’은 ‘다윗의 자손’(12:35), ‘이스라엘의 왕’(15:32), ‘찬송 받을 이의 아들’(14:61) 등과 같은 유대식 칭호가 아니라 다소 경멸적 의미가 있는 로마식 칭호였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 그리스도냐”(14:61)라고 경멸하듯 예수님께 질문한 것처럼 빌라도도 예수님을 비하하는 태도로 질문했을 것입니다. 이 칭호는 후에 십자가 위에 걸린 죄 패에도 기록되었는데(15:26) 이 경우에도 유대인 전체를 조롱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칭호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십자가 죽음 이전에 경멸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고 자신의 고난을 주도적으로 감당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가 공동체의 경우,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현실에서 로마를 전복하실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지만 유대인뿐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며 구원자로 오셨음을, 마가는 로마의 핍박을 받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 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생활속으로
아래 질문들의 의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질문들 밑의 칼럼은 토론을 진행하는데 추가적인 안목을 주기 위해 제공된 것입니다. 각 질문에 대한 생활 나눔을 마치고 참석자들 중에 한 사람에게 읽도록 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답하신 후 여러 가지 고소에 대해 모두 침묵하십니다. 이는 십자가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모범이 됩니다. 우리는 진실해야 하고 무엇보다 희생을 통해 십자가의 사명이 이루어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수많은 오해와 갈등과 손실에도 침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고난과 죽음을 침묵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은 순수함의 극치이십니다. 반면, 대제사장들의 충동에 미혹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무리의 모습은 어리석고 미련하게 기회를 버린 죄인의 결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함과 침묵으로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함께 기도하기
- 대립과 갈등이 난무한 곳에서 예수님의 진실함과 침묵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화목의 도구로 사용해 주소서.
- 자발적으로 십자가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희생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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