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성경공부교재

14-09-28 11:44

10월 5일 주일성경공부교재

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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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하고 허무한 인생 돌아보기 전도서 1:1~11


이야기속으로
아래 질문들은 이번 과의 주제에 대한 괄적인 나눔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의 목적은 솔직한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나누고, 주제에 대해 생각이 열렸다고 판단되면 '본문 속으로' 넘어가십시오.

IMF로 인해 모두가 어렵다고 하던 시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남편의 사업은 크게 번창했고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남편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지도 못했고, 그것을 지키지도 못했다. 오만하게 방심하다가 결국 사업체를 잃어버리게 되자, 남편은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이어졌고, 참으로 쉽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고 놀라웠다. 현실은 아직 어렵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자라나서 평안하고 기쁘기까지 하다. ‘해’와 ‘바람’, ‘강물’ 등 만물이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9절) 하고 있으며, 세대가 거듭되지만 인생도 헛되어 ‘기억됨이 없으리라’(11절)라는 본문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누렸던 부와 명예, 그리고 불행이라 여겼던 실패와 질병, 불명예까지도 헛되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땅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헛되나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내 믿음이 허무하지 않으니 감사할 뿐이다.

* 먹어도 먹어도, 가져도 가져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느꼈던 적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인도자를 위한 예화
모라비안파를 창시한 진젠도르프는 백작으로서 지위가 대단히 높았을 뿐 아니라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이 모든 지위와 조건을 다 내팽개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 좋은 것을 다 버리고 복음만을 외치며 다니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짐 엘리엇도 미국의 명문 대학 출신으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으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사로 헌신해 남미 에콰도르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주님께 헌신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Sharing Point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로움이 부재하는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애타게 찾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갈급함을 가지고 그 답을 끊임없이 구하고 찾는 사람이 진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속으로
본문을 통해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을 이번 과의 주제와 연관해 나눠 보는 순서입니다. 세 번의 질문은 모두 해석 질문으로서, 그것을 읽고 해당 본문을 찾아 함께 답을 말해 보십시오.
1. 전도자가 인생과 비교하기 위해 예로 든 대상은 무엇인가요?(4~7절) 그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생의 헛됨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8절)

전도자는 인생을 땅, 해, 바람, 강물과 비교합니다. 대자연은 모두 영구하고, 변함없이 그리고 끝없이 순환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해와 바람, 강물처럼 쉬지 않고 수고하며 노력하지만 만물이 피곤한 것과 같이 헛되고 만족함이 없습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헛됨을 설명하기 위해 변하지 않는 자연의 영구한 일반적인 모습을 예시로 듭니다. 땅은 영원히 있고, 해는 떴다가 지는 것이 반복되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바람도 이리저리 불지만 불던 자리로 되돌아가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계속하여 흐릅니다. 우리가 보기에 모든 사물은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것 같으나 사실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사례로 설명한 것은, 세대를 거듭하며 수고하는 인간의 모든 수고도 종국에는 어떠한 유익도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지만 아무리 수고하고 애쓰더라도 그 결과의 허무함은 자연 만물이 끝없이 순환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경험으로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결국 인간이 구하려 하는 인생의 새로운 가치란 해 아래에 없다는 것을 결론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 언제나 변함없는 대지, 매일 뜨고 지는 해, 스치는 바람, 흐르는 강물을 통해 느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나누어 보세요.

우리는 푸르른 땅과 변함없이 뜨고 지는 태양,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는 서늘한 바람,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연의 풍요와 안식, 성실과 정직의 법칙을 깨달으며 인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척박하고 메마른 땅,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하루를 열고 닫는 해, 허무함과 외로움을 전해 주는 바람, 속절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과 절망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건, 시간과 장소, 환경과 시대마다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본문에서 시시콜콜하게 사람들의 행사를 하나하나 논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연과 우주의 운행을 기술하고 이러한 자연의 모습을 통해 만물이 피곤하다고 결론짓습니다(8절). 왜냐하면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기 때문입니다(9절).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는 새로울 것도 기억될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전도자는 언제나 새로운 것 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운행과 구조로부터 인생 역시 지루하고 피곤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결과입니다.

2. 전도자가 인생의 헛됨을 빗댄 두 가지 표현은 무엇인가요?(9, 11절) 이처럼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한 전도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전도자는 인생의 헛됨을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9절), “기억됨이 없으리라”(11절)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단지 인생을 허무주의로 결론지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가 자신의 이름 대신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1절)라는 호칭을 사용한 이유는, 인생은 헛되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신앙적인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1장에서 전도자가 사용하는 주제어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동사들입니다. ‘헛되도다’(2절),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9절), ‘기억됨이 없으리라’(11절)라는 표현은 모두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힐렐 학파는 전도서를 가리켜 ‘거룩한 손을 더럽히는 책’이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 역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에 자신을 일컬어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한 것은 전도서가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을 가진 이가 전하는 메시지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자신을 일컬어 ‘전도자’라고 말하는데 이는 ‘코헬렛’이라는 히브리어로서 ‘회중 앞에서 말하는 사람’, ‘설교자’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신앙의 기초 위에서 설교하는 메신저임을 자처하는 것을 보면 그가 결코 인생의 허무함만을 전하려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서의 첫 주제인 2절의 ‘헛되고 헛되다’라는 표현은 전도서 마지막 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12:13)라는 명령을 천명하기 위한, 진정한 긍정을 위한 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통탄할 사건을 만났을 때, 오히려 깊은 묵상과 성찰을 통해 긍정적인 결론을 얻은 적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보세요.

인생의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인생은 헛되며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허무함에 탄식하게 될 때가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래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소망을 붙듭니다. 구약성경의 여호와 신앙 전승을 통해 나타난 독특한 히브리적 영성은 바로 탄식에서 찬양으로의 변화입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은 홍해에서의 구원 찬양이 되었고, 골리앗 앞에서 탄식하던 이스라엘은 다윗으로 인해 승전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시편의 수많은 탄식시들은 결국 찬양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도서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절)라는 인생에 대한 부정 역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라는 인생에 대한 긍정으로 발전합니다. 지독한 부정의 길을 관통하여 마침내 진정한 긍정의 지평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전도자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하심입니다. 인생을 참되게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적극적으로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의 중심 구절이 책의 서두(1:2)와 결말(12:8)에 반복됩니다. 한 문장 안에 ‘헛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이 5회나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총 73회 사용되었고, 그중 38회가 전도서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의 중심 주제가 ‘헤벨’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에서 사용된 ‘헤벨’의 용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수고나 노력이 어떤 결과나 유용성 없이 끝난 경우를 나타냅니다. 둘째, 인간의 행동과 그 결과를 선명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셋째, 이러한 판단 뒤에는 인간의 무상함에 대한 전도자의 통찰이 있는데, 인간을 모든 피조물과 같게 만드셨다는 것(3:19), 인간의 모든 미래는 죽음의 운명 아래 놓여 있다는 것(11:8), 모든 사건은 미리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의미 있게 파악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1:14; 2:26). 이렇게 인간이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활속으로
아래 질문들의 의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질문들 밑의 칼럼은 토론을 진행하는데 추가적인 안목을 주기 위해 제공된 것입니다. 각 질문에 대한 생활 나눔을 마치고 참석자들 중에 한 사람에게 읽도록 해도 좋습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살던 시대의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현실 앞에서, 한계가 분명한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가치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의 고뇌는 믿음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경건한 의심’을 함축적으로 대변하는 말이 ‘헛되다’(헤벨)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말한 ‘헤벨’은 진정한 삶의 의미와 긍정의 삶을 찾기 위한 부정이었습니다. 이 부정은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함께 기도하기
- 각자 처한 환경에 대해 세상 사람들처럼 ‘팔자소관’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발견하며 감사하는 믿음을 주소서.
- 탄식과 절망으로 몰아가는 부정적인 사건을 만날 때, 오히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승리를 기대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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