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성경공부교재

14-12-08 16:19

12월 14일 주일성경공부교재

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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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으니 예레미야애가 3:19~39

이야기속으로
아래 질문들은 이번 과의 주제에 대한 포괄적인 나눔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의 목적은 솔직한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나누고, 주제에 대해 생각이 열렸다고 판단되면 '본문 속으로' 넘어가십시오.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인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길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마음 깊은 탄식과 절망, 헤어날 수 없는 낙심이 소망으로 변하는 근거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분이 자비와 긍휼로 선을 베푸신다는 약속에 있다. 교회학교 행사를 준비하면서 동료 교사와 의견 차이가 생겨 마음이 언짢았다. 며칠 동안 상대방을 미워하고 정죄하며 불평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배려심도 이해심도 없는 내 모습에 몹시 낙심되었다. ‘나는 왜 달라지지 않지? 교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격이 있나?’ 오늘 말씀은 마음이 무너지도록 실망스러운 나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그 소망은 낮고 겸손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며 날마다 새롭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다리는 데서 비롯된다. 이 아침에 소망의 근거가 되시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절히 바라며 내 죄를 회개한다.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웃을 저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하고 정죄하며 불평한 죄를 회개합니다!”

* 내가 쉽게 절망하고 좌절하는 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인도자를 위한 예화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께 한 신학생이 찾아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도 낙망하실 때가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저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제 삶에 적용하고 있었는데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저는 단 한 순간도 주님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낙망을 모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사람들이 비판하거나 비웃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분만큼 많은 반대와 조롱과 핍박을 당한 분이 또 있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붙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가셔야 했던 십자가의 길을 담담히 걸어가셨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낙심을 하나님께 맡기고 마지막에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Sharing Point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유다 백성을 향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소망을 이야기하며 고난을 끝까지 견딜 것을 촉구합니다. 자신이 좌절감을 느끼는 문제는 무엇인지, 그런 좌절감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 함께 나누어 봅니다.
본문속으로
본문을 통해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을 이번 과의 주제와 연관해 나눠 보는 순서입니다. 세 번의 질문은 모두 해석 질문으로서, 그것을 읽고 해당 본문을 찾아 함께 답을 말해 보십시오.
1.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19~32절)

예레미야는 소망의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분을 잠잠히 의뢰하고 기다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지켜보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수차례 죽음의 위협을 감수했던 일을 언급하며, 현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황폐해진 유다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19절)은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과거 경험을 뜻하고, 그가 ‘낙심’(20절)한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예레미야는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함을 발견합니다. 죄악으로 인해 성읍이 파괴되고 유다 백성이 열방에 흩어졌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뜻하신 최종적인 섭리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붙들고 계시고 언젠가 자비를 베푸실 날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또한 그는 고난이 주는 유익에 관해 깊이 생각합니다. 사람이 젊은 날에 멍에를 메는 것은 비록 힘든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 될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을 땅에 대는 겸손한 자세로 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도우실 것입니다.

* 어려움에 빠질 때,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나요? 고난 속에서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세요.

예레미야가 겪은 고초와 재난, 그리고 그로 인한 ‘쑥과 담즙’의 경험은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이 엄위함을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모든 교만의 뿌리를 뽑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듭니다. 예레미야가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의미 없이 그분의 자녀들에게 고초와 재난을 허락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심판과 징계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어려운 상황 때문에 절망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우리를 살립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에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것과 그 고난 속에 특별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멍에를 메게 된 것은 주께서 메우셨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28절). 주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메게 하시고, 땅의 티끌에 입 맞추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게 하십니다. 지금은 근심하게 하실지 모르나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다시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2.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어떻게 말하나요?(33~39절)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보고 계시고 그분의 주권적인 섭리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유다의 철저한 패망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일,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해 유다를 심판하셨고 그들에게 고생과 근심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37절).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38절) 나옴을 그는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들 때문에”(39절) 벌을 받는 것이니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일어난 일이기에 그분의 선하신 뜻을 신뢰하며 받아들여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선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쉽게 이해하지만, 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직접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심판을 당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면 그 거부감은 더욱 커집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친다고 본다면 우리 모두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악에 우리도 연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 백성이 그들의 죄악 때문에 끔찍한 파괴와 상실을 겪은 사건은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의 악을 미워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가 됩니다. 그 당시 유다에서는 법 집행이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약한 자가 고통과 굴욕을 당하고, 타락한 지도자가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유다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고난과 슬픔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복과 은혜와 평강을 주시려는 것입니다(민 6:24~26).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주권적으로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19절)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죽을 고비와 고난을 뜻합니다. ‘인자’는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이며, ‘긍휼’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23절).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침마다 만나를 공급해 주신 것처럼 그분의 인자와 긍휼로 인해 그분의 백성에게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멍에’는 소, 나귀 등의 목에 얹어 쟁기나 수레를 끌게 하기 위한 도구지만, 종종 ‘압력, 굴복, 예속, 율법의 제한’ 등을 비유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28절)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사람들이나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29절)는 입이 땅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숙이라는 말로,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30절)는 대적의 경멸과 비난을 참아 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생활속으로
아래 질문들의 의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일상에 적용하는데 도움을 주려는 것입니다. 질문들 밑의 칼럼은 토론을 진행하는데 추가적인 안목을 주기 위해 제공된 것입니다. 각 질문에 대한 생활 나눔을 마치고 참석자들 중에 한 사람에게 읽도록 해도 좋습니다.
유다에 임한 재앙으로 절망에 빠진 예레미야가 새 소망을 갖게 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백성은 예레미야로 인해 한 줄기 강렬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지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두려움에 빠진 백성에게 희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본심이시며, 우리 죄악을 다루기 위해 환난과 대적을 잠시 허락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계획 있는 심판이요 그분의 징계는 사랑의 징계입니다(시 66:10). 고통 속에서도 나를 정금같이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됩니다.

함께 기도하기
- 환난 중에서도 모든 상황을 붙들고 계신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기대하며 고난을 인내하게 하소서. 
- 날마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에 힘쓰게 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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