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성경공부교재

14-03-24 11:21

3월 30일 다섯째주 주일 성경학교 성경공부 교재입니다.

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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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무엘상 24:1~15 )

 

이야기속으로

아래 질문들은 이번 과의 주제에 대한 괄적인 나눔을 이끄는 것입니다. 이 질문들의 목적은 솔직한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정답이 아닌 각자의 답을 나누고, 주제에 대해 생각이 열렸다고 판단되면 '본문 속으로' 넘어가십시오. 

 

휴대 전화에 모 집사님의 번호가 벌써 세 번째 떴다. 받지 않으려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상대로 성경 공부 문서를 입력해 달라고 요청하시며, 퇴근 후 본인 사무실에 와서 작업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마지못해 “네”라고 했지만 가뜩이나 이런저런 일로 심란한 터라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집사님께 회사 업무 때문에 도와 드리기 어려우니 구인 사이트에서 아르바이트할 사람을 구하시라고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다는 집사님의 답문을 보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기꺼이 돕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었고, 계속 부탁만 하시는 집사님이 미웠다. 다윗은 자기 목숨을 노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권위로 세워진 왕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그를 해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과 권위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준 다윗을 보니, 연세가 있으신 집사님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럽다. 주일에 집사님께 죄송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책을 선물해야겠다. 윗사람을 섬기며 끝까지 도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겠다.


사람들이 ‘옳은 것’보다 ‘좋은 것’을 선택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인도자를 위한 예화
조엘 소넨버그는 20개월 된 평범한 아기였을 때 비극적인 교통사고를 당했다. 몸의 85퍼센트 이상에 3도 화상을 입어 새까맣게 타버린 숯 덩어리 같았다. 어린 나이에 수많은 수술을 거쳐야 했지만 하나님은 조엘을 기적처럼 살려 주셨다. 사고가 있은 지 18년 뒤 교통사고를 일으킨 범인이 붙잡혔다. 공판이 열리던 날 조엘은 범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저에게서 유년 시절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제 가족을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빼앗지 못했습니다. 저는 18년 동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말과 반응을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의 주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한이 없다는 것을 당신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증오심으로 제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망과 절망은 또 다른 고통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으로 둘러싸일 것입니다.” (이창용, 「교회 다니면서 큐티도 몰라?」, 국제제자훈련원)


Sharing Point
이 세상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외적 행동과 모습을 보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합니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세상의 평판에 따라 늘 이리저리 요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맑은 사람은 늘 깨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본문속으로
본문을 통해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을 이번 과의 주제와 연관해 나눠 보는 순서입니다. 세 번의 질문은 모두 해석 질문으로서, 그것을 읽고 해당 본문을 찾아 함께 답을 말해 보십시오.


1.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누구와 함께 어디까지 쫓아왔나요?(1~2절)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었을 때 어떻게 했나요?(3~7절)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왔습니다. 사울이 변을 보기 위해 동굴에 들어왔을 때 마침 다윗 일행이 그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조심스럽게 베어 내고 어느 누구도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숨어 있던 동굴에 사울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사울을 자신에게 붙이신 것으로 확신하고 단숨에 그를 처치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만 처치한다면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을 끝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를 따라다니는 부하들도 더 이상 필요 없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사울을 죽여야 마땅했습니다. 분명 다윗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순간적으로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사울의 옷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 것이니 어느 누구도 사울을 해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고도 그는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인해서 양심이 찔렸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짓지 않고 선을 행하고자 늘 양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종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 양심을 따라 행하지 않아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있나요? 양심을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경험을 나누어 보세요.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선악을 아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다(창 3:22).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려 할 때 궁극적으로 악의 길로 빠져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위해 양심이란 것을 주셨습니다. 양심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죄를 깨닫고 선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예수님을 판 유다조차도 양심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전을 돌려주고 나서 결국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물론 양심은 우리에게 온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양심을 따라 정직하게 산 사람들은 자기 의와 교만으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양심이 있는 불신자들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잘못을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들은 양심을 따라 살면서 순결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2. 다윗은 왜 사울을 죽이지 않았나요?(10절) 그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12~13, 15절)

다윗이 사울을 해하지 않은 것은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과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자신을 위해 사울에게 보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재판장이 되셔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울을 향해 ‘주여’라고 부르며 굳이 절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했지만 다윗은 그에게 악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내 주여”(6, 8절), “나의 아버지”(11절)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자신도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을 조금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사울을 존중하며 영적 질서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사울을 버리셨는데도 그는 많은 아픔과 희생을 감당하면서 이 영적 질서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셔서 모든 것을 판단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사울을 죽인다면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속담대로 사울과 똑같이 악인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내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관심은 왕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 있었습니다.


* 악에 대해 악으로 보복한 적이 있나요? ‘정의의 수호’와 ‘사랑의 실천’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 나누어 보세요.

악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악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 쉽게 또 빨리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그 대가는 또다시 내가 지불해야 합니다. 이로써 악은 악을 부르고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은 결코 악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교만은 겸손으로만 이길 수 있고, 미움은 사랑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비록 그가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를 알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공의를 앞세우면서 혹시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우리가 자비로워지는 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악인들을 대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양분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히 선한 사람도, 완전히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선과 악으로 뭉쳐진 존재입니다. 내 안에는 천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악마가 될 수 있는 위험성이 공존합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알 때 지금 내게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도 자비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본문 이해를 위한 도우미
양심이란 무엇일까요? 영어에서 양심, ‘conscience’라는 단어는 원래 영어의 ‘with’, ‘together’(함께)의 뜻을 가진 라틴어 ‘com’과, ‘내가 알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sscio’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우리 내면에서 함께 안다’는 뜻입니다. 양심이란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는 내적 지식인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양심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낯설지 않은 용어였습니다. 당시 이 단어는 ‘어떤 나쁜 행동을 했을 때 느끼게 되는 마음의 고통’을 의미했습니다. 내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 마음, 즉 착하고 밝은 마음과 나쁘고 어두운 마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마음속 기준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를 알려 주는 내적 관념입니다. 두 가지 마음 중에서 착하고 밝은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형상의 일부로, 인간을 인간 되게 하는 선한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세지속으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44~45).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판별해 주는 시금석입니다. 정의와 해방을 위해 혁명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것은 결국 더 큰 불의와 폭력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지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주님이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에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진정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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